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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ies

사실과 진실

김소연의 마음사전 중에서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사실은 언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 편집되고 만들어진다는 건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싶어서 객관화된 사실에 집착하곤 한다. 사실이라는 것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를 극복한 객관화가 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내가 들고 있는 이 머그잔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둥근 원이지만, 옆에서 바라보면 직사각형이듯, 사실은 언제나 전체의 형상을 놓친다. 머그잔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입체적이고 다각적인 시선도 놓치는 것이 많다. 머그잔의 질감을 제대로 알려면 보는 것보다는 만져보아야 하며, 더 자세한 속성을 알려면 두드려도 보고 깨뜨려도 보아야 한다. 그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면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므로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여기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이 진실보다 더 애매하다. 사실에는 진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실은 언제나 매복해 있다. 매복해 있기 때문에 불쑥불쑥 드러나며,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다. 사실처럼 입체적인 각도를 이뤄낼 수도 없다.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고 심안(心眼)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은 몇 가지 단서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진실은 단서를 들이댄다고 해서 추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켜켜이 쌓인 것들을 풀어 헤쳤을 때에 오히려 산만해진다. 진실은 언제나 덩어리째 존재해야만 형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낱낱이 분석할수록 명징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진실은 분석하고 나면 형체가 흐트러지고 종합했을 때에 오히려 명징해지는 속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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